알풀과학

우주 상수가 몇 %만 달랐어도, 당신의 피는 흐르지 못했을까요?

액체가 얼마나 묽어질 수 있는지에는 '바닥'이 있습니다. 그 바닥을 정하는 건 액체가 아니라 — 우주의 기본 상수예요.

← 너무 되직 (꿀·유리) 너무 묽음 (기체에 가깝게) → 생명 가능 창 우리 우주는 여기

지금 당신의 혈관에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세포 하나하나 안에서는 영양소와 단백질이 쉼 없이 옮겨 다니고요. 이 모든 게 액체가 흐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액체가 너무 되직하면 순환이 멈추고, 너무 묽으면 또 세포가 형태를 못 잡아요. 생명은 그 사이 어딘가, 꽤 좁은 '묽기'에서만 굴러갑니다. 여기까지는 상식이지요. 이상한 건 그다음입니다 — 액체가 얼마나 묽어질 수 있는지의 한계를, 정작 액체가 아니라 우주의 기본 상수가 정한다는 겁니다.

기본 상수라는 건 우리가 '그냥 그 값'이라고 외우는 숫자들이에요. 플랑크 상수, 전자의 질량, 전자의 전하 같은 것들. 왜 하필 그 값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숫자 몇 개가 조금만 달랐어도 — 별이 원소를 못 만들고, 원자가 못 뭉치고, 액체가 흐르지 못했으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걸 우주의 미세조정(fine-tuning)이라고 불러요.

미세조정 이야기는 보통 아주 큰 규모 — 별, 은하, 우주 팽창 — 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2020년 이후, 물리학자 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끌고 왔습니다. 세포 하나 안으로요.

01점성에는 '바닥'이 있다

액체를 데우면 묽어집니다. 냉장고에서 꺼낸 꿀은 안 흐르지만, 데우면 주르륵 흐르지요. 물도, 기름도 마찬가지예요. 온도를 올릴수록 점성(끈적임)이 내려갑니다. 그럼 계속 데우면 점성이 0까지 떨어질까요?

아닙니다. 어느 지점에서 점성이 더는 내려가지 않고 되돌아섭니다. 액체마다 '가장 묽어질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여기까지는 실험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2020년, 런던 퀸메리대의 코스탸 트라첸코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바딤 브라즈킨이 그 한계값을 계산해 냈습니다. 놀라운 건 결과의 생김새였어요. 이 최소 점성이 액체의 종류와 거의 무관하게, 기본 상수만으로 정해지더라는 겁니다.

νmin = (1/4π) · ℏ / √(me · m)
ℏ 플랑크 상수 · me 전자 질량 · m 분자 질량

여기 ℏ(플랑크 상수)가 들어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플랑크 상수는 양자역학의 상수예요. 점성이라는, 우리가 손으로 만질 만큼 큰 세계의 성질이 사실은 양자역학이 정한 바닥을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자의 질량이 지금보다 무거웠다면 이 바닥이 내려갔을 테고, 플랑크 상수가 컸다면 올라갔겠지요.

그리고 물은 — 이 이론적 바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물을 포함한 여러 액체의 최소 점성이 νmin에서 몇 배 이내에 들어와요.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이, 양자역학이 허락하는 가장 묽은 상태에 꽤 가깝게 붙어 있다는 겁니다.

점성은 액체의 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바닥은 우주가 정해 둔 것이었어요.

02생명은 그 바닥 근처에서 산다

여기서 트라첸코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023년 논문에서요.

생명은 결국 물질을 옮기는 일입니다. 세포 안에서 단백질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영양소가 막을 넘고,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 이게 전부 액체 속에서 분자가 움직이는(확산) 과정이에요. 너무 되직하면 분자가 못 움직여 대사가 멈추고, 너무 묽으면 구조가 안 잡힙니다. 생명이 쓸 수 있는 점성과 확산에는 꽤 좁은 창(窓)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01에서 봤듯이, 점성이 묽어질 수 있는 한계는 기본 상수가 정합니다. 그러니 생명이 쓸 수 있는 창의 위치도 기본 상수에 매여 있다는 논증이 성립해요. 상수를 몇 % 바꾸면 세포 속 액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되직해지거나 묽어진다 — 트라첸코는 이걸 '생명 친화 창(bio-friendly window)'이라고 불렀습니다. 혈액의 점성마저 순환에 딱 맞는 값 근처에 있다는 거고요.

이 논증의 값어치는 새로움에 있습니다. 아래에서 직접 상수를 바꿔 보면, 창이 얼마나 좁은지 감이 옵니다.

잠깐 — 기본 상수를 직접 바꿔 보세요

플랑크 상수 ℏ를 우리 우주 값에서 얼마나 밀지 골라 보세요. 점성의 바닥(νmin)이 함께 움직입니다. 아무것도 저장되지 않아요.

플랑크 상수 ℏ를 이만큼 바꾼다

액체가 묽어질 수 있는 한계 (점성의 바닥)

우리 우주 — 점성의 바닥이 생명 가능 창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세포 속 물질 수송도, 혈액 순환도 이 근처에서 무리 없이 일어나지요.

이 다이얼은 트라첸코 논증의 얼개를 도식으로 보인 것입니다. 창의 너비와 눈금은 실제 측정값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스케치예요. νmin ∝ ℏ 라서 ℏ를 바꾼 만큼 바닥이 같은 비율로 움직인다는 점만 정확합니다. 전자 질량을 바꾸면 √ 관계로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트라첸코 본인도 이 '생명 친화 창' 논증을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제안으로 내놨습니다. §01의 점성 바닥 계산은 학술지 심사를 거친 단단한 물리이지만, 그걸 생명의 미세조정으로 잇는 §02의 도약은 아직 논의가 시작된 가설이에요. 이 둘을 뭉뚱그리면 안 됩니다.

03낡은 이야기의 새 층

사실 '상수가 조금만 달랐어도 생명은 없었다'는 이야기 자체는 오래됐습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전부 하늘의 이야기였어요.

가장 유명한 건 탄소입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는 별 속에서 헬륨 원자핵 셋이 부딪혀 만들어집니다(삼중 알파 과정). 그런데 이게 이론상 너무 어려운 반응이라, 1953년 프레드 호일은 탄소-12에 딱 맞는 에너지의 '문(공명 상태)'이 있어야만 한다고 예언했고 — 실제로 발견됐습니다. 훗날 계산에 따르면 핵력의 세기가 몇 %만 달랐어도 이 문이 어긋나 탄소나 산소가 거의 안 만들어졌을 거라고 해요. 별이 우리 몸의 재료를 못 굽는 우주가 되는 거죠.

또 하나는 우주 상수입니다.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를 정하는 이 값을 소립자 이론으로 계산하면, 실제 관측값보다 무려 10120나 큰 값이 나옵니다. 이 값이 조금만 컸어도 우주가 너무 빨리 찢어져 은하도 별도 못 생겼을 겁니다. 1987년 스티븐 바인베르크가 이 점을 파고들어, 관측될 우주 상수의 상한을 미리 어림했던 걸로 유명하지요.

트라첸코의 기여는 이 목록에 새로운 층을 하나 더한 데 있습니다. 별과 우주가 아니라 세포 규모의, 응집물질물리에서 나온 조건이니까요. 게다가 그는 이 점성·확산 조건이 미세구조 상수와 양성자-전자 질량비를 그대로 둔 채로도 바뀔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논문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별에서 무거운 원자핵이 만들어지는 데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점성·확산의 한계만 따로 흔들 수 있다는 거예요. 기존의 별·원소 미세조정과 겹치지 않는, 독립된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04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듣다 보면 저절로 어떤 결론으로 미끄러집니다. "이렇게 딱 맞을 리가 없다, 누가 맞춰 놓은 것 아니냐"고요. 여기서 브레이크를 밟겠습니다. 과학이 말할 수 있는 것과, 그 위에 얹는 해석을 섞으면 안 되거든요.

먼저, 미세조정은 '관찰'이고 설계는 '해석'입니다. 상수가 조금 달랐다면 우리가 아는 생명이 어려웠으리라 — 이건 계산으로 말할 수 있는 관찰이에요. 하지만 상수가 이 값인지에 대해 물리학이 진지하게 검토하는 답은 대략 셋입니다. ① 다중우주 + 인류 원리: 상수가 제각각인 우주가 무수히 많고, 생명은 당연히 살 만한 우주에서만 자기를 발견한다(그래서 우리 눈엔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② 아직 없는 더 깊은 이론: 상수들이 실은 자유롭지 않고 어떤 근본 법칙이 값을 강제한다(그러면 애초에 '조정'이랄 게 없다). ③ 그냥 그런 것: 설명이 아직 없다. '설계'라는 답은 이 물음에 대한 철학적·종교적 해석이지, 데이터가 가리키는 과학적 결론이 아닙니다. 물리 자체는 이 셋 중 어느 것도 아직 못 고릅니다.

둘째, '생명'은 늘 '우리가 아는 생명'입니다. 미세조정 논증은 은근슬쩍 생명이 꼭 물·탄소·지금의 화학이어야 한다고 가정해요. 상수가 다른 우주에서는 다른 화학, 다른 복잡성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주도 하나, 생화학도 하나만 표본으로 갖고 있어서 '얼마나 드문지'를 사실은 잘 모릅니다. 더글러스 애덤스가 남긴 비유가 날카로워요 — 웅덩이가 자기가 담긴 구덩이를 보며 "이 구덩이가 나한테 어쩜 이렇게 꼭 맞지? 날 위해 만들어진 게 틀림없어"라고 감탄한다는 겁니다. 물이 구덩이 모양에 맞춘 건데 말이죠.

셋째, 숫자를 너무 믿지 마세요. "몇 %만 달랐어도"라는 표현은 직관을 주려는 어림이지, 모든 상수에 똑같이 적용되는 정밀한 문턱이 아닙니다. 상수 여러 개를 동시에 조정하면 다시 생명 가능한 조합이 나오기도 하고요. 미세조정을 정량화하는 방식 자체가 물리학·철학에서 아직 논쟁 중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우주가 설계됐다"가 아닙니다. 훨씬 담백해요 — 우리 몸속 액체가 흐르는 일조차, 우주의 가장 밑바닥 상수와 이어져 있더라는 것. 그 연결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는, 정직하게 말해 아직 모릅니다.

점성과 확산이 결국 '분자가 액체 속에서 얼마나 잘 돌아다니느냐'의 이야기라는 걸, 글로만 읽으면 좀 미끄럽습니다. 입자가 퍼지고, 상태가 갈리고, 양자 세계에서 확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눈으로 보는 게 빠릅니다.

SIM 입자의 운동 — 확산
세포 속 물질 수송의 본체. 분자가 액체 속에서 퍼지는 속도가 곧 생명의 속도다
SIM 물질의 세 가지 상태
고체·액체·기체를 가르는 입자의 자유도 — 점성이라는 성질이 사는 자리
SIM 터널 효과와 확률의 세계
점성의 바닥에 왜 플랑크 상수가 끼어드는가 — 큰 세계 밑에 깔린 양자의 얼굴
한 장 정리
  • 점성엔 바닥이 있다 — 액체를 데워도 점성은 어느 한계까지만 내려간다. 그 최소값 νmin = (1/4π)ℏ/√(mₑ·m)은 기본 상수만으로 정해진다(Trachenko & Brazhkin, 2020). 물도 이 바닥에서 몇 배 이내에 있다.
  • 플랑크 상수가 끼어든다 — 손으로 만질 만큼 큰 세계의 점성이, 사실은 양자역학이 정한 바닥을 둔다.
  • 생명 친화 창 — 세포 속 확산·혈액 순환이 좁은 점성 범위를 요구하고, 그 범위가 기본 상수에 매여 있다는 논증(Trachenko, 2023). 저자 스스로 확정이 아닌 제안이라 밝힘.
  • 독립된 층 — 이 조건은 미세구조 상수·양성자-전자 질량비를 그대로 둔 채 흔들 수 있어, 별의 원소 생성(호일 삼중 알파)·우주 상수(바인베르크) 같은 고전적 미세조정과 겹치지 않는다.
  • 선 긋기 — 미세조정은 관찰, 설계는 해석. 물리가 검토하는 답은 다중우주+인류 원리 / 더 깊은 이론 / 미지 셋이며, 어느 것도 아직 확정이 아니다. '생명'은 늘 '우리가 아는 생명'이고(웅덩이 비유), "몇 %"는 정밀 문턱이 아니다.

수업에서 기본 상수를 이야기하면 학생들은 대개 심드렁합니다. 외울 숫자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면 눈빛이 바뀝니다 — "이 숫자가 조금만 달랐어도, 지금 네 혈관에서 피가 못 흘렀을지도 몰라." 그 말이 과장인지 아닌지, 어디까지가 물리이고 어디부터가 소망인지를 스스로 가려내는 것 — 저는 그게 이 주제로 배울 수 있는 가장 값진 능력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왜 상수가 이 값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 몸속 액체 한 방울과 우주의 밑바닥을 한 줄로 잇고 있어요. 저는 그 줄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근거 — 1차 자료
  1. Trachenko, K. & Brazhkin, V. V. (2020). "Minimal quantum viscosity from fundamental physical constants", Science Advances 6, eaba3747 (2020-04-24). 액체 운동학적 점성의 하한 νmin = (1/4π)ℏ/√(me·m). '기본(elementary) 점성'은 양성자-전자 질량비를 포함해 ιm = (ℏ/4π)√(mp/me). 실제 액체의 점성 최소값이 이 이론값 근처(몇 배 이내)에 있음을 보고. 프리프린트: arXiv:1912.06711. 대중 해설: Physics World.
  2. Trachenko, K. (2023). "Constraints on fundamental physical constants from bio-friendly viscosity and diffusion", Science Advances 9, eadh9024 (2023). '생명 친화 창' 논증. 초록 원문대로 "점성·확산·생화학 기계의 속도 기울기에 대한 한계는 미세구조 상수와 양성자-전자 질량비를 그대로 둔 채 바뀔 수 있으며, 별에서 무거운 원자핵이 만들어지는 데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 다중 조정에 관한 추측(conjecture)으로 제시한다. 프리프린트: arXiv:2302.13618.
  3. Trachenko, K. (2023). "Viscosity and diffusion in life processes and tuning of fundamental constants", Reports on Progress in Physics 86, 112601. 위 논증을 정리한 리뷰. 프리프린트: arXiv:2307.05273.
  4. "몇 % 변화로 혈액 점성이 순환에 부적합해진다"는 표현은 트라첸코의 어림 설명으로, 정밀한 문턱이 아니라 직관을 위한 것. 최근 재조명 보도: ScienceDaily (2026-05-08), 퀸메리대 보도자료 인용. 본문 §01의 점성 하한(2020)은 심사 논문의 단단한 결과이나 §02의 생명 친화 창(2023)은 저자 스스로 밝힌 제안·추측임에 유의.
  5. 삼중 알파 과정과 호일 상태 — 별에서 탄소-12가 만들어지려면 특정 에너지의 공명 상태가 필요하다는 1953년 예언과 발견. 핵력·전자기력을 몇 % 바꾸면 탄소·산소 생성이 크게 흔들린다는 계산: Triple-alpha process, Hoyle state. 정확한 문턱은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 논쟁이 있다.
  6. 우주 상수 문제와 인류 원리 상한 — 소립자 이론의 진공 에너지 추정이 관측값보다 ~10120배 크다는 것, 그리고 Weinberg (1987)의 인류 원리적 상한: Cosmological constant problem, Anthropic principle.
  7. 해석의 층(다중우주·인류 원리·설계 논쟁)과 반론 — '미세조정 우주'는 관찰이며 그 설명은 미결이라는 개관, 그리고 '우리가 아는 생명' 가정에 대한 비판: Fine-tuned universe. 더글러스 애덤스의 '웅덩이' 비유는 1998년 Digital Biota 2 강연 「Is there an Artificial God?」(사후 The Salmon of Doubt, 2002 수록)에서 유래.
  8. 인터랙션의 다이얼은 트라첸코 논증의 도식이며 실측 창 너비가 아니다. νmin ∝ ℏ 관계(ℏ를 바꾼 비율만큼 바닥이 이동)만 정확히 반영했고, 창의 위치·너비는 이해를 돕기 위한 스케치다.
교과서 개념을 눈으로 — 3D 시뮬레이션 라이브러리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