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기억을 만든다는 건 다들 압니다. 그런데 뇌가 하나도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슬라임 몰드, 물속을 떠다니는 단세포 하나, 배양접시에 담긴 사람 세포. 이것들이 최근 실험에서 '기억'과 '학습'처럼 보이는 행동을 잇달아 보여줬습니다. 뇌 없이 어떻게 그럴까요? 그리고 — 그걸 정말 '기억'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수업에서 기억을 이야기하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뇌를, 정확히는 신경세포와 시냅스를 떠올립니다. 맞는 그림입니다. 우리가 아는 기억은 대부분 신경망이 만듭니다. 근데 지난 몇 년 사이, 신경망이 전혀 없는 생물과 세포에서 기억을 닮은 현상이 계속 보고됐습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종류를 바꿔 가며 여러 번요.
01뇌 없는 것이 '지겨워한다' — 습관화
먼저 슬라임 몰드 이야기부터. 정식 이름은 황색망사점균(Physarum polycephalum), 별명은 '블롭'입니다. 뇌도 신경도 없는,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세포 덩어리예요. 그런데 2016년 프랑스 연구진이 재미있는 걸 시켰습니다.
먹이로 가는 길목에 쓰지만 해롭지는 않은 다리(퀴닌이나 카페인을 바른)를 놓았습니다. 처음에 블롭은 그 쓴맛이 싫어서 다리를 건너길 머뭇거리고 몸을 잔뜩 움츠렸습니다. 근데 며칠 반복하자 태도가 바뀝니다. '아, 이거 쓰기만 하지 실제로는 안 해롭네' 하듯 머뭇거림 없이 성큼성큼 건너기 시작한 거죠. 그러다 며칠 쉬게 하면 다시 원래대로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이 패턴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습관화(habituation) — 해롭지 않은 자극이 반복되면 반응을 줄이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학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지막 문장이에요. 쉬면 반응이 되살아난다는 것. 만약 블롭이 그냥 지쳐서 반응이 준 거라면(감각 피로), 쉰다고 되돌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되살아났다는 건 '지친 것'이 아니라 '무시하기로 학습한 것'에 가깝다는 신호입니다. 학습을 피로와 구별하는 이 기준은 신경과학이 오래 써 온 잣대예요.
단세포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나팔 모양의 거대 단세포 생물 스텐토르(Stentor coeruleus)는 툭툭 건드리면 몸을 움츠립니다. 그런데 같은 세기로 계속 건드리면 어느 순간부터 무시하죠. 이건 100년도 더 전(1906년, 제닝스)에 관찰됐다가 한동안 논쟁 속에 묻혔는데, 2023년 연구진이 세포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다시 재서 확인했습니다. 각 세포가 '반응함 ↔ 무시함' 사이를 스위치처럼 딱 넘어가더라는 겁니다. 뇌 없이, 세포 한 개가요.
02배양접시 속 사람 세포가 '간격'을 구별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통째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4년, 더 놀라운 실험이 나왔습니다. 뉴욕대 연구진이 접시에서 키운 사람 세포(신장에서 유래한 세포주 등, 신경세포가 아닙니다)에게 기억의 아주 유명한 특징 하나를 시험했거든요.
그 특징은 간격 효과(spacing effect)입니다. 똑같은 양을 공부해도 한 번에 몰아서 하는 것보다 간격을 두고 나눠서 하는 쪽이 더 오래 남는다는, 사람 기억의 오래된 성질이죠. 벼락치기보다 분산학습이 오래 간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연구진은 세포에 '기억 스위치'를 켜면 빛이 나도록 장치를 심었습니다. 여기서 스위치란 CREB라는 단백질인데, 동물의 장기기억을 켜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세포에 화학 신호를 줬어요. 한 번은 한꺼번에 몰아서, 한 번은 네 번에 걸쳐 간격을 두고. 총량은 같게요.
결과가 이 글의 핵심입니다. 간격을 두고 네 번 받은 세포가 더 세게, 더 오래 빛났습니다. 몰아서 한 번 받은 세포보다요. 세포가 신호의 '총량'만이 아니라 '리듬'을, 즉 언제 어떤 간격으로 왔는지를 구별한 겁니다. 그리고 그 신호를 전달하는 경로(ERK와 CREB)를 약으로 막자, 이 간격에 따른 차이도 사라졌습니다. 원리까지 짚은 거죠.
세포가 기억의 '내용'을 담는다는 게 아닙니다. 신호의 '간격'을 구별해 더 오래가는 흔적을 남긴다는 것 — 사람 기억이 벼락치기보다 분산학습을 좋아하는 바로 그 성질이, 세포 한 개에도 이미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세포라면 — 몰아서 vs 나눠서
같은 '총량'의 신호(또는 공부)를 어떻게 받았는지 골라 보세요. 남는 '흔적'을 눈으로 비교해 봅니다. 아무것도 저장되지 않습니다.
수치는 두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도식이지, 정확한 실험값이 아닙니다. 방향(나눠서가 더 오래 남음)은 사람 기억 연구와 2024년 세포 실험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JS가 꺼져 있어도 결론은 같습니다 — 몰아서는 흔적이 약하게 남고, 나눠서는 더 세고 오래가는 흔적을 남깁니다. 사람의 뇌에서도, 뇌 없는 세포에서도요.
03그런데 — 이걸 '기억'이라 불러도 될까요?
여기서 솔직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아직 뜨겁게 논쟁 중인 땅 위에 서 있거든요.
비판하는 쪽의 지적은 날카롭습니다. "슬라임 몰드가 다리를 건너는 것도, 세포가 더 오래 빛나는 것도, 결국 분자들의 화학 반응으로 전부 설명된다. 거기에 '기억'이니 '학습'이니 하는, 원래 뇌를 두고 만든 말을 갖다 붙이는 건 의인화(anthropomorphism) 아니냐"는 겁니다. 즉, 현상은 진짜지만 이름표가 과하다는 거죠.
반대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들은 '기저 인지(basal cognition)'라는 틀을 제안합니다. 기억·학습을 뇌만의 특권으로 보지 말고, 살아있는 시스템이 환경의 정보를 받아 시간에 걸쳐 행동을 바꾸는 능력으로 넓게 보자는 관점이에요. 그렇게 보면 습관화나 간격 효과는 뇌가 이미 있던 세포의 능력을 물려받아 키운 것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저는 이게 상당 부분 '기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과학사에서 이런 정의 싸움은 흔히 좋은 신호였어요 — 새 현상이 낡은 단어의 경계를 밀어붙일 때 나오는 진통이니까요. 한 저명한 비교인지학자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무턱대고 사람에 빗대는 것도, 반대로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것도 둘 다 답이 아니라고요. 어떤 능력은 세포까지 공유하고, 어떤 것은 뇌에만 있을 겁니다. 그 선을 하나씩 그어 보는 게 지금 이 분야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글의 제목에 붙은 따옴표 — 뇌 없는 세포도 무언가를 '기억'할까요 — 의 그 따옴표를, 아직은 떼지 않고 두는 게 정직합니다.
04흔적은 어디에 남을까 — 세포라는 무대
그렇다면 뇌도 없는 세포는 도대체 '어디에' 흔적을 남기는 걸까요? 답은 세포 안에 있습니다. 신호가 들어오면 세포는 그 신호를 안쪽으로 전달하고, 결국 어떤 유전자를 켜서 단백질을 만듭니다. 방금 본 CREB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 기억과 관련된 유전자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 만들어진 단백질이 얼마나, 얼마나 오래 남느냐가 '흔적'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결국 세포의 기본 살림살이 — 신호가 어떻게 들어오고, 유전자가 어떻게 단백질을 만드는지 —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 무대를 직접 뜯어보면 '세포의 기억'이라는 말이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SIM 세포의 구조와 기능기억의 무대인 세포 — 신호를 받아들이는 막부터 유전자가 있는 핵까지 직접 뜯어보기 → SIM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
유전자 스위치(CREB 같은)가 켜지면 실제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흐름을 조작해 보기 →
05세포부터 시험장까지 — 간격을 두세요
이 이야기에는 교실로 바로 가져올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간격 효과예요.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몰아서 한 번보다 나눠서 여러 번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건, 사람을 상대로 100년 넘게 확인돼 온 아주 단단한 결과입니다(분산학습). 벼락치기가 시험 다음 날이면 증발하는 이유죠. 그런데 이번 세포 실험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겁니다 — 이 성질이 뇌의 고급 기술이 아니라, 세포 수준에서부터 이미 작동하는 아주 오래된 원리일 수 있다는 것.
물론 세포 실험이 곧 '이렇게 공부하라'를 증명한 건 아닙니다. 그건 사람 기억 연구가 이미 보여준 몫이에요. 다만 저는 이 겹침이 좋습니다. 배양접시 속 세포가 간격을 좋아하고, 여러분의 뇌도 간격을 좋아합니다. 오늘 4시간 몰아서 볼 걸, 네 번에 나눠 보세요. 여러분의 세포들이 이미 그걸 더 잘 기억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 습관화 — 해롭지 않은 자극이 반복되면 반응을 줄이는 가장 단순한 학습. 슬라임 몰드(2016), 단세포 스텐토르(2023)에서 확인. 쉬면 되살아나는 점이 '피로'와 구별.
- 간격 효과(2024) — 배양접시 속 사람 비신경 세포가, 같은 총량이라도 신호를 '나눠서' 받으면 더 세고 오래가는 흔적(CREB 활성)을 남겼다.
- 흔적의 정체 — 세포가 유전자를 켜 단백질을 만드는 것. 신호 전달 경로(ERK·CREB)를 막으면 효과도 사라짐.
- 아직 논쟁 중 — 이걸 '기억·인지'라 부를지는 의인화 논란과 정의의 문제. '기저 인지' 관점 대 신중론이 팽팽하다.
- 교실 적용 — 몰아서보다 나눠서(분산학습). 세포에서 사람까지 관통하는 오래된 원리.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뇌가 없는 세포도 무언가를 기억할까요? 지금 가장 정직한 답은 이렇습니다 — 기억을 닮은 흔적은 분명히 남긴다. 다만 그걸 '기억'이라 부를지는, 우리가 그 말의 뜻을 어디까지 넓힐지에 달려 있다. 바로 옆, 접시 하나 안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아직 지도가 덜 그려져 있다는 것 — 저는 그게 이 이야기의 약점이 아니라 매력이라고 봅니다.
이 글의 근거 — 1차 자료
- Kukushkin, N. V., Carney, R. E., Tabassum, T., & Carew, T. J. (2024). The massed-spaced learning effect in non-neural human cells. Nature Communications, 15, 9635. — 비신경 사람 세포에서 간격 효과(간격 두고 준 신호가 CREB 활성을 더 오래 유지)를 확인, ERK·CREB 억제 시 소멸.
- Boisseau, R. P., Vogel, D., & Dussutour, A. (2016). Habituation in non-neural organisms: evidence from slime mould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283, 20160446. — 슬라임 몰드가 쓴맛 자극에 습관화하고, 쉬면 반응이 되살아남(자발적 회복).
- Rajan, D., Makushok, T., Kalish, A., … Marshall, W. F. (2023). Single-cell analysis of habituation in Stentor coeruleus. Current Biology, 33(2), 241–251. — 단세포 스텐토르가 반복 자극에 '스위치처럼' 습관화.
- 기저 인지(basal cognition)의 개념과 의인화 논쟁은 다음의 개관을 참고: Quanta Magazine, “What Can a Cell Remember?” (2025) 및 관련 리뷰. — 본문의 '세포를 기억이라 부를지'의 찬반은 이 논쟁을 요약한 것으로, 확정된 합의가 아니라 진행 중인 논쟁임.
- 간격 효과(분산학습)가 사람 기억에서 오래 확인돼 온 점은 에빙하우스(1885) 이래의 방대한 기억 연구 전통에 근거함.